'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가 개봉한 지 한참 지나 DVD로 나온 지금에야 나는 DVD방에 가서 이걸 보았다. 뭐, 영화관에서 보고 싶었지만 상황도 상황이고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던 때도 아니었기에 개봉 당시 못 보았던 나는 [비극은 보지 않는다]를 신조로 삼는 친구를 억지로 끌고 같이 보러갔다. 오프닝은 동화책의 첫 구절처럼 시작하더라.
『 아주 먼 옛날, 인간들은 모르던 지하왕국, 행복과 평화로 가득 찬 환상의 세계에 공주가 있었다. 햇빛과 푸른 하늘이 그리웠던 공주는 인간 세계로의 문을 열고 만다. 하지만 너무나 눈부신 햇살에 공주는 기억을 잃은 채로 죽어갔다. 』
하지만 동화같이 시작한 오프닝과 달리 영화의 내용은 잔혹하고 냉정했다. 솔직히 아이들이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잔혹성도 있었고, 환타지라기보다는 휴먼드라마+전쟁영화 같은 느낌이었지만 나는 이 영화의 장르를 따지기 전에 정말 잘 만든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오필리아의 눈 앞에 나타난 판은 그녀가 지하세계의 공주라며, 돌아가기 위해서는 세 가지 미션을 해결해야한다고 한다. 그 미션 또한 식상하지만 단순하지 않은데, [용기]와 [인내]와 [희생]에 관한 미션이다. 지하세계=지옥이라는 단순한 연결고리로 보아서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용기도 인내도 희생도 모두 자신보다는 남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니까. 그게 왜 지하세계의 공주에게 필요한 거지??
하긴, 행복과 평화만이 있는 세계라고 했으니 그럴수도 있는건가??
전설을 믿고 몽상에 빠져 사는 소녀, 오필리아. 새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 한 복판에서 살게 된 그녀는 욕실에 숨어 혼자 동화책을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침으로써 현실도피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새아버지는 자신을 싫어했으며, 어머니는 새아버지에게 목을 매어 잘 보이려고 노력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보다는 자신의 핏줄에 대한 욕심이 컸던 새아버지에게 오필리아는 썩 달가운 존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외면할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되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너무 불행하다고 느껴지는 현실에 오필리아는 책에 더욱 더 빠져들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의 눈 앞에 요정이 나타나고 요정을 따라 간 곳에서 [판]을 만난다.
판은 그녀가 지하세계의 공주였는데, 인간계를 동경해서 몰래 빠져나갔다가 햇빛에 기억을 잃고 죽었다고, 왕이 공주의 영혼을 애타게 찾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판은 그녀에게 지하세계로 가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며, 세가지 미션을 제안한다. 펼치면 글씨가 나타나는 책을 건네받은 오필리아는 첫번째 미션을 수행하러 간다.
책에 나온대로 커다란 고목을 찾아간 오필리아. 어머니가 주신 새 옷을 나무 가지에 걸쳐두고 나무 기둥 속으로 한발짝씩 발을 떼었다. 몸을 숙여 좁은 굴을 기어들어간 오필리아 앞에 커다란 두꺼비가 나타나고, 오필리아는 재치있게 두꺼비를 속여서 판이 준 돌을 두꺼비가 먹게한다. 두꺼비는 속을 다 내놓고 뒤집어져서 죽어버리고, 오필리아는 그 속에 붙어있던 열쇠를 떼어 굴을 빠져나온다. 굴 밖은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아 새카만 밤이었고, 오필리아의 새 옷은 비바람에 날려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다. 이 일로 그녀는 어머니에게 실망을 안기고 크게 혼나지만, 판으로부터는 격려를 받는다.
[ 두려운 상대에게 맞서 목적을 달성하는 첫번째 미션 - 용기 ] 클리어.
그사이 어머니는 좋지 않던 건강이 다시 악화되어 몸져 눕게 되고, 그런 오필리아의 걱정 어린 소리를 들은 판은 오필리아에게 [ 만드레이크]를 건넨다. 만드라고라라고도 불리는 이 생물은 사람처럼 생긴 뿌리인데, 우유와 핏방울을 양식으로 산다고 했다. 오필리아는 그가 시킨대로 어머니의 침대 밑에 만드레이크를 숨기고 우유와 핏방울을 준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어머니의 상태는 호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새 아버지가 그것을 발견하게 되고, 흉물스럽게 생긴 만드레이크를 보며 오필리아가 새 동생을 질투해 저주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버린다. 화가난 그는 오필리아가 극구 말림에도 벽난로 속에 만드레이크를 던져버리고, 오필리아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것은 비명을 지르며 타 죽는다. 그리고 호전되었던 어머니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면서 하혈을 하고 쓰러지고 만다. 오필리아는 그것이 만드레이크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새아버지를 원망하지만, 새아버지는 오필리아가 저주를 걸어서 엄마의 몸이 약해졌고, 아이가 위험해졌다고 결론지어버리고 그녀를 더 더욱 싫어하게 된다.
또다시 나타난 판. 그는 그리면 문을 만들 수 있는 요술 분필과 요정이 담긴 가방, 모래시계를 건네며 오필리아에게 두번째 미션을 말해준다. 분필로 다른 세계와 통하는 문을 만들고 요정을 따라 지정된 장소로 간 뒤, 첫번째 미션에서 얻은 열쇠로 문을 열고 그 안의 검을 찾아오는 일.
벽에 분필로 그림을 그려 문을 만든 오필리아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긴 복도에 도착했다. 가방을 열자 요정들이 나와 그녀를 안내하기 시작했는데, 복도의 끝에는 눈이 없는 괴물이 만찬이 차려진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그 앞에 놓인 접시에 담긴 눈 알 두개를 보며 인상을 찌푸린 오필리아는 요정들이 안내하는 대로 열쇠구멍에 열쇠를 넣고 그 안의 검을 찾아낸다.
검을 가방에 넣은 오필리아는 돌아서서 출구로 향하는데, 음식에 깃든 마력에 혹해서 열매 하나를 먹고 만다. 그 순간 움직이기 시작한 괴물. 요정들이 말림에도 손을 휘저으며 먹는 것을 계속하던 오필리아는 요정 한 마리가 괴물에게 뜯어먹히며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도망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너무 시간을 지체한 탓에 출구는 닫혀버리고, 오필리아는 천장에 문을 만들어 가까스로 도망치는 것에 성공한다.
검은 찾아왔지만, 아무것도 먹지 말라던 판의 말을 어기고 요정을 잃은 오필리아에게 판은 크게 화내며 말한다.
" 당신은 실패했어요. 다신 돌어갈 수 없습니다. 인간처럼 늙어가고, 인간처럼 죽게될겁니다. 당신의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따라 소멸될겁니다. "
라고 말하고 검을 들고 요정들과 함께 사라진다.
그러나 사라졌던 판은 며칠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나타나 오필리아에게 남동생을 데리고 미로로 오라고 말한다. 남동생이 왜 필요하냐는 오필리아의 질문에 [필요하다]라고만 대답한 판은 사라지고 오필리아는 남동생을 데리고 요정의 안내를 따라 미로로 향한다.
남동생을 데리고 온 오필리아에게 판은 한 손엔 두번째 미션에서 가지고 온 검을 든 채, 다른 한손을 내민다. 남동생을 제물로 바쳐 지하세계의 문을 연다는...
하지만 끝내 동생을 버리지 못한 오필리아는 판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새 아버지에게 동생을 빼앗긴 뒤, 새아버지의 총에 맞아 죽는다.
오필리아는 정말 환상을 보고 있었을까?
나는 그것에 먼저 의의를 제기한다. 그렇다. 영화 이곳 저곳에서 [판]이 오필리아의 환상임을 암시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어머니와 메르세데스의 대사들과 오필리아의 눈 앞에서만 살아 움직이는 만드라고라와 미로에서 오필리아를 따라 온 아버지에게는 보이지 않는 판 등과 같이 말이다.
[판은 거짓말쟁이란다]라는 메르세데스의 말을 듣고 순진하게 오필리아가 그에게 속고 있다고 생각하며 언제 판이 자신의 본색을 드러낼지 모른다고 두근두근하며 영화를 보는, 어찌보면 순진하고 어찌보면 멍청한 밤냥이이기에 오필리아의 환상에 의의를 제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동화라면, 엔딩에서 보인 두 세계를 모두 진짜라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현실에서의 오필리아는, 그러니까 오필리아의 육체는 아버지의 총에 맞아 죽었지만, 그녀의 영혼(공주의 영혼)은 지하세계로 돌아가 다시 행복한 생활을 맞이했다고.
하지만 엔딩의 지하세계의 모습까지도, 마지막에 그것을 떠올리며 미소지은 채 죽어가는 오필리아의 모습을 화면에 잡음으로써 그것까지도 오필리아의 상상의 지속이다라고 증명하며 이 영화의는 장르가 비극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만든다.
안타까운 엔딩. 그러나 잘 만들어진 이야기.
이왕 환타지 영화라면 좀 더 환상적이고 행복한 엔딩을 맞아도 좋으련만, 영화는 끝에 끝까지 '이것은 모두 오필리아의 환상입니다.' 라고 관객에게 주입시켜버린다. 영화를 보는 동안 오필리아가 되어버렸던 나는 그 엔딩이 마음에 안들고 안타깝지만 그래도 인정한다. 이 이야기는 정말 잘 만들어진 잔혹동화다. 아이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지만, 세 개의 미션으로 어른들에게는 조금은 감명을 주었을 것 같은 이야기.
자아.
인터넷에서 찬사와 혹평을 받아가는 영화이지만, 나는 정말 재미있게 봤다.
비극적인 것을 싫어하는 배오리는 날로 봤다. -보는 둥 마는 둥-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감상이니 혹여 나보고 [덜컸다]거나 [아직 애로구나]등의 말은 하지 말아주길.
어차피 정원의 모든 글엔 리플이 안달린다.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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