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창작이라는 것은 무척 고민스럽고 고통스럽다.
비록 남들이 '허세 쩐다' 비웃을지라도, 싸이월드에 난무하는 메인 프로필 글도 창작의 산물이고
만우절을 이용해서 '걸리면 좋고 안 걸리면 말고'의 고백문자를 보내는 것도 창작의 산물이다.
아주 작은 것도 그렇게 고민되고 어려운데, 하물며 영화의 주인공인 소설가는 어떨까.
이 영화는 소설가 주인공을 표본으로 현 시대를 대변하고 질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젠가부터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몸이 아픈 불치병보다는 마음이 아픈 병에 걸려왔다. 현 시대의 사람들도 발전한 과학기술에 몸은 건강해졌고 평균 수명도 연장되었지만, 외로움과 여러가지 정신적 어려움에서 온 정신질환에 시달리게 되었다. 한국인 대다수가 우울증을 겪고 있다고 하고, 자신도 모르는 채로 상태가 심화되는 경우가 많다한다. '중2병'이라는 신조어로 비하하고 우습게 보지만, 그런 자신도 사실 그 병에 걸려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모두들 남의 일이라고 생각한 채 점점 지쳐들가고 있는 거다. 나도 그렇고.
정신적 압박에서 오는 스트레스. 믿을 수 없는 현실 혹은 받아들이기 싫은 진실에 부딪혀 사람은 현실을 부정하며 등 돌리고 정신적으로 무너진다. 내가 지치지 않고 웃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고, 이 병을 고칠수 있는 방법이기도 한 말을 영화의 후반에서 관객에게 알려준 것 같다.
'믿음'
시대가 발전하고 '눈 뜨고 코 베인다'라는 말이 당연시 되는 사회가 되어버리니 사람이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고 믿는 것이 어려워져서, 정말 나 혼자 있는 것이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보다 편해지는 세상이 되었다. 사람이 선하게 태어났다(성선설)는 증거도 없지만 악하게 태어났다(성악설)는 증거도 없다. 어차피 아무런 증거 없다면, 그냥 착하다고 믿는 게 나을 것 같다. 내가 먼저 믿음을 주면 그 믿음이 다시 돌아온다고 생각하는 나를 누군가는 어리석다고 말할 지 모르지만, 그게 무너지지 않고 일어서는 내 힘이 된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티를 내지는 않지만, 외로움을 많이 타고 사람을 좋아하는 나는 더 더욱 그렇다.
영화는 장화홍련과 비슷한 반전을 가지며, 스릴러였다가 호러였다가 액션을 반복하는데, '귀신의 복수'가 아니라 사람에 의해 진행이 되어서 다행스럽다. 이 이야기가 '죽은 이의 원한, 그리고 복수'였다면 이 영화는 정말로 호러영화가 됐겠지. 서장의 입장과 네 사람의 입장, 각자 등장인물들의 입장에서 억지스러움이 없어서 좋다. 다만, 수진이 어머니의 갑작스런 사망은 염통을 쫄깃하게 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특별히 개연성을 느끼지는 못했다. 왜 그녀가 그 타이밍에 죽어야만 했는지. 풀어가던 실마리를 다시 놓치게 하기 위해 필요했다고는 하지만, 꼭 그렇게 사람 놀래키면서 해야하는지. 정말 한 여름에 개봉해도 서늘하게 사람 놀래킬 것 같은 영화지만, 이 영화가 공포 영화가 아닌 건 '귀신'이 아닌 '사람'이 주인공이기 때문이고 그들이 이야기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다시 저택으로 떠나면서 남편에게 말을 한다.
'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믿지 않아도 당신은 나 믿어준다고 했잖아. ' 라고.
나를 믿어주는 단 한 사람, 그 믿음에 의심 할 여지가 없다는 것으로도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
나도 의심 할 여지없이 날 믿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이렇게 태평하게 앉아, 웃으며 영화평이나 써내려가고 있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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