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를 읽기 전부터 만화를 좋아하는 나는 이미 '보노보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가 단순하게 귀엽기만 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도. 미간이 넓은 멍청한 표정을 한, 이 파란 해달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이 존재한다는 것도. 사실 이 책은 출간 후 베스트셀러였고 미디어에서도 자주 다뤘기 때문에 책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구입한 것은 올해 1월이다. 그러고도 책을 책장에 꽂아두기만 하고 읽지는 않았었다. 그러다가 어제, 퇴사와 함께 시간을 내서 이 책을 다 읽었다.
책을 읽는 데는 세 시간 반쯤이 소요되었는데, 작가의 문체는 멋이 잔뜩 들어간 힘 있는 문장도 아니었고 정말 보노보노처럼 힘 빠진 노곤노곤한 느낌이라 읽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럼에도 술술 읽히는 것은 또 아니었는데 그건 아마 내가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라 그런 걸수도 있겠다. 베개에 올려놓고 책을 펼쳐서 30페이지쯤 읽어나갔을 때, 날씨도 좋은데 밖에 나가서 볕 좀 쬐라는 지인의 카페 기프티콘 선물로 가까운 카페로 책을 들고 나왔다.
한적한 금요일 오후 두 시. 가까운 카페 파스쿠찌에서 달달한 스트로베리 그라나따를 주문하고 넓은 테이블에 홀로 앉아서 책을 펼쳐 들었다.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지 못하는 나는 카페의 음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는데 그래서 더 책을 읽는 속도가 더디었던 것 같기도 하다.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는 지금 이 시점의 나에게 필요한 책이었다. 이 책을 샀던 1월은 내가 지옥의 늪을 헤매고 있을 때였기에 너무나 힘들어서 책에 손을 뻗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지옥보다는 덜한 우울의 늪을 흐느적거리고 있어서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현재의 우울함을 벗어나기에는 커다란 변화보다는 아주 작은 변화가 필요하다. 아주 작게 시작할 수 있고 어렵지 않게 마무리를 지을 수 있으며 그로 인해서 작은 성공을 맛볼 수 있는 일. 나는 그 시작을 책 읽기로 정했고 책장의 책들 중 '보노보노'를 선택했다.
살아있는 한 무조건 곤란할 수밖에 없다고. 곤란하지 않게 사는 방법 따위는 결코 없으니 그냥 곤란해하라는 야옹이형의 말. 그렇다. 사실 회사를 그만두어서 곤란하기는 하다. 벌어놓은 돈도 없고 비빌 사람도 없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회사를 때려치웠으니 곤란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다시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 하고 앞으로 살 길도 걱정해야 하고. 그런데 나는 그 와중에도 '꿈'을 꾸고 있는 어른이라서 곤란하다. 작가는 꿈 따위 없다고 했지만 나는 서른 초중반. 아직도 꿈이 있고 꿈을 이루고 싶어 하는 어른이다. 그렇다고 그게 뭐 이상한 건 아니다. 매일매일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이 되고 걱정이 되고 곤란해하는 나는 이상한 게 아니라고 보노보노는 말해준다.
화내는 것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다. '내 것'이 뭔지 알려주고 싶어서 화가 난다는 말. '내 것'은 뭘까. 사실 내가 가진 것이 뭐가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증명하기 어려워서 더욱 화가 나고 답답한 것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노력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 세상에서 내 노력들은 쓸데없고 부질없어진다. 내 사람이 내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은 데 그러지 못하는 것. 내 사람이 내 사람이라는 걸 인정받지 못하는 것. 그런 것도 지금의 내가 화가 나는 것 들 중 하나인 것 같다. 화가 나고 하지만 그 화를 낼 상대가 없고 그러니 화가 자연스럽게 나한테 돌아오고 그러니 우울해진다.
이럴 때는 프레리독 스타일의 위로가 필요하다. 아무런 말없이 그저 따뜻한 체온으로 토닥여주는, 사람의 온기가 전하는 위로가. 저런 방법으로 위로를 하는 프레리독도, 그 위로에 기분이 좋아진 보노보노도 공감이 갔다. 나는 지금은 위로가 필요한 사람인데, 나도 누군가를 위로할 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삶이 365일 재미있을 수만은 없겠지. 하지만 난 재미있었으면 좋겠다. 일상에서 소소한 재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왜 이렇게 지쳐버린 건지 모르겠다. 꿈도 희망도 없고 재미도 없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반항 같기도 하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게 똑같다면 사는 의미가 없지 않을까. 마음이 힘들 때는 무엇이든 사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아무렇지 않은 무미건조한 일상에서 버틸 힘이 나지 않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언가 일어나기를 기대한다면 그건 욕심이 맞다. 하지만 무언가를 계속해도 아무것도 벌어지지 않는다면...?
얼마나 하고 싶은지로 정해진다고 해도,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는 없는 한계도 있다.
지옥의 늪을 헤매는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지 못할 책이지만, 우울의 늪을 헤매는 사람에게는 조금 쉬어가도 된다고 말해주는 책.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나는 쉬어가야 할 그 타이밍에 쉬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이렇게 지쳐 있는 건 아닐까. 책을 읽는다고 딱히 내 삶에 해답이 보이지는 않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알겠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겠다. 밥을 먹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배고픔은 사라지지만, 배고픔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겠다. 일단은 그것부터 해야겠다.
p.s. 다 읽은 책은 다시 구입했던 알라딘중고서점에 팔았는데, 구입가는 7,500원이었고 판매를 7,200원에 팔았다. 포인트로 적립을 했더니 20% 추가 적립이 되어서 최종 판매가는 8,640원. 뭔가 개이득인 느낌이다. 아무튼 책 읽고 되팔고 리뷰쓰기 퀘스트 완료.
책을 읽는 데는 세 시간 반쯤이 소요되었는데, 작가의 문체는 멋이 잔뜩 들어간 힘 있는 문장도 아니었고 정말 보노보노처럼 힘 빠진 노곤노곤한 느낌이라 읽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럼에도 술술 읽히는 것은 또 아니었는데 그건 아마 내가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라 그런 걸수도 있겠다. 베개에 올려놓고 책을 펼쳐서 30페이지쯤 읽어나갔을 때, 날씨도 좋은데 밖에 나가서 볕 좀 쬐라는 지인의 카페 기프티콘 선물로 가까운 카페로 책을 들고 나왔다.
한적한 금요일 오후 두 시. 가까운 카페 파스쿠찌에서 달달한 스트로베리 그라나따를 주문하고 넓은 테이블에 홀로 앉아서 책을 펼쳐 들었다.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지 못하는 나는 카페의 음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는데 그래서 더 책을 읽는 속도가 더디었던 것 같기도 하다.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는 지금 이 시점의 나에게 필요한 책이었다. 이 책을 샀던 1월은 내가 지옥의 늪을 헤매고 있을 때였기에 너무나 힘들어서 책에 손을 뻗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지옥보다는 덜한 우울의 늪을 흐느적거리고 있어서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현재의 우울함을 벗어나기에는 커다란 변화보다는 아주 작은 변화가 필요하다. 아주 작게 시작할 수 있고 어렵지 않게 마무리를 지을 수 있으며 그로 인해서 작은 성공을 맛볼 수 있는 일. 나는 그 시작을 책 읽기로 정했고 책장의 책들 중 '보노보노'를 선택했다.
살아있는 한 무조건 곤란할 수밖에 없다고. 곤란하지 않게 사는 방법 따위는 결코 없으니 그냥 곤란해하라는 야옹이형의 말. 그렇다. 사실 회사를 그만두어서 곤란하기는 하다. 벌어놓은 돈도 없고 비빌 사람도 없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회사를 때려치웠으니 곤란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다시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 하고 앞으로 살 길도 걱정해야 하고. 그런데 나는 그 와중에도 '꿈'을 꾸고 있는 어른이라서 곤란하다. 작가는 꿈 따위 없다고 했지만 나는 서른 초중반. 아직도 꿈이 있고 꿈을 이루고 싶어 하는 어른이다. 그렇다고 그게 뭐 이상한 건 아니다. 매일매일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이 되고 걱정이 되고 곤란해하는 나는 이상한 게 아니라고 보노보노는 말해준다.
화내는 것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다. '내 것'이 뭔지 알려주고 싶어서 화가 난다는 말. '내 것'은 뭘까. 사실 내가 가진 것이 뭐가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증명하기 어려워서 더욱 화가 나고 답답한 것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노력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 세상에서 내 노력들은 쓸데없고 부질없어진다. 내 사람이 내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은 데 그러지 못하는 것. 내 사람이 내 사람이라는 걸 인정받지 못하는 것. 그런 것도 지금의 내가 화가 나는 것 들 중 하나인 것 같다. 화가 나고 하지만 그 화를 낼 상대가 없고 그러니 화가 자연스럽게 나한테 돌아오고 그러니 우울해진다.
이럴 때는 프레리독 스타일의 위로가 필요하다. 아무런 말없이 그저 따뜻한 체온으로 토닥여주는, 사람의 온기가 전하는 위로가. 저런 방법으로 위로를 하는 프레리독도, 그 위로에 기분이 좋아진 보노보노도 공감이 갔다. 나는 지금은 위로가 필요한 사람인데, 나도 누군가를 위로할 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삶이 365일 재미있을 수만은 없겠지. 하지만 난 재미있었으면 좋겠다. 일상에서 소소한 재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왜 이렇게 지쳐버린 건지 모르겠다. 꿈도 희망도 없고 재미도 없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반항 같기도 하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게 똑같다면 사는 의미가 없지 않을까. 마음이 힘들 때는 무엇이든 사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아무렇지 않은 무미건조한 일상에서 버틸 힘이 나지 않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무언가 일어나기를 기대한다면 그건 욕심이 맞다. 하지만 무언가를 계속해도 아무것도 벌어지지 않는다면...?
얼마나 하고 싶은지로 정해진다고 해도,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는 없는 한계도 있다.
지옥의 늪을 헤매는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지 못할 책이지만, 우울의 늪을 헤매는 사람에게는 조금 쉬어가도 된다고 말해주는 책.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나는 쉬어가야 할 그 타이밍에 쉬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이렇게 지쳐 있는 건 아닐까. 책을 읽는다고 딱히 내 삶에 해답이 보이지는 않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알겠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겠다. 밥을 먹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배고픔은 사라지지만, 배고픔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겠다. 일단은 그것부터 해야겠다.
p.s. 다 읽은 책은 다시 구입했던 알라딘중고서점에 팔았는데, 구입가는 7,500원이었고 판매를 7,200원에 팔았다. 포인트로 적립을 했더니 20% 추가 적립이 되어서 최종 판매가는 8,640원. 뭔가 개이득인 느낌이다. 아무튼 책 읽고 되팔고 리뷰쓰기 퀘스트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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