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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독립문, 독립공원,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울 여행 셋째날. 롯데월드에서 하루 종일 줄 서고 다리 아프고 안경 잃어 버리고 수난을 겪었던 지난 날. 셋째날은 전날 갑자기 떠올랐지만 가고 싶어했던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다녀왔다.

민민의 계획은 여기 갔다가 그 옆에 박물관에 갔다가 경복궁도 가고 종묘제례악을 보러 가자는 그런 계획이었는데, 경복궁만 해도 1day class 라서 ㅋㅋㅋㅋㅋㅋㅋ 실제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다 돌고 나서는 저녁시간이 되어서 저녁 먹고 바로 종묘로 이동해야만 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도 규모가 그렇게 큰 것은 아닌데 꼼꼼하게 둘러보게 되면 시간을 꽤 많이 잡아먹더라. 물론, 우리가 오후 늦게 일어난 것도 한 몫을 하긴 했음.

숙소가 있는 을지로3가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한번에 독립문역으로 이동을 할 수 있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니 멀리에 독립문이 보였다.


독립공원 입구에 이전되어 세워진 독립문. 원래는 이 곳에 세워져 있지 않았는데 고가도로를 만들면서 이전한 것 같다.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면 독립문 앞에 있는 저 기둥 위에 처마지붕이 있는 것 같은데 현재는 기둥만 남아 있었다.


원래 위치에서 옮긴 것이기에 독립문 이전비가 독립문 옆에 세워져 있다. 뒷면에는 독립문이 언제 세워졌고 왜 위치를 옮겼는지에 대해서 쓰여 있었다.


독립문은 1898년에 독립협회에서 세운 것으로 본래 지금 세워져 있는 곳에서 동남측 70미터 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비석 뒤로 보이는 고가도로인 성산대로 건설을 하려고 이쪽으로 옮겨서 세웠다고 한다. 본래 석재를 사용하여 옛모양 그대로 옮겼고 1979년 완공되었단다. 옛날 자리에는 독립문이 있던 자리라며, '독립문지'라고 새겨진 표지판을 매설, 그 위치가 보존되도록 만들었다. 비석에 새겨진 날짜로 보아 이전비는 1980년 1월 1일 날짜에 세워진 것 같다.


정면에서 본 독립문. 사실상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나 보던 것을 이렇게 보니 참으로 기분이 오묘하다. 중고등학교 역사 교육과정을 단순히 암기해야하는 것으로 가르치지 말고, 역사적 명소에 견학을 겸하면서 흥미를 갖게 하면서 더불어 이론 교육을 시키면 '단순 암기 과목'에서 벗어나 '재미있고 친근한 과목'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단순암기가 싫어서 역사 과목을 등한시 했던 내 중고교 시절을 되돌아 볼 때, 확실히 암기시키는 것보다는 직접 느끼게 하는게 훨씬 나은 것 같다. 일단 나란 인간은 그렇다. 국사시간과 세계사 시간에 잠만 퍼자던 학생이 이렇게 역사적 사건들과 지명에 관심을 갖게 될 줄은 몰랐지.


독립공원 안쪽으로 들어오면 송재 서재필 선생의 동상이 서 있다. 개화운동가이고 독립운동가이기도 한데,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했다. 독립협회를 창립한 멤버이기도 하다. 본래 중국을 사대하는 영은문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고 한다.


동상 앞의 설명문을 보니 윤치호 선생, 이상재 선생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했다. 이상재 선생님은 내 고향인 충남 서천 출생의 사회운동가다. 한산면에 생가지가 있다. 몰랐는데 놀랍게도 조선일보 사장이었었음. 이상재 선생의 상은 종묘 앞에 있고, 아무튼 여기엔 서재필 선생의 상이 있다. 전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쳤는데, 그 당시의 독립운동가분들을 보면 대단하고 존경스러우면서도 의아하다. 그리고 그분들이 이렇게 열심히 지킨 나라가 이 상태라서 좀 죄송하다.


이상재 선생 상을 지나서 공원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3.1 독립선언 기념탑이 있다.


가까이에서 보면 이렇게 생겼다. 사실 3.1 독립선언 기념탑이라면 어쩐지 탑골공원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왜 독립공원에 있을까.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해서 재건국민운동본부 주관, 국민 성금으로 1963년 8월 15일에 건립되었다. 이때는 탑골공원에 있었는데, 1979년에 철거되었다가 서울시에서 1992년에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그러니까 원래 탑골공원에 있었다는 거군. 역시 그런 거군. 탑 뒤에는 3.1 독립선언문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탑을 지나서 포장도로를 따라 좀 더 걸어가면 서대문형무소의 외벽이 보인다. 벽돌담만 보는데도 마음이 아파진다.


황금연휴에 이 곳을 찾은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어 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서대문형무소를 찾아와 있었다. 오묘하다. 역사관이지만 이 곳은 단순한 관광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도 웃고 떠들지 않고 다들 진지 근엄한 표정으로 역사관 안을 서성인다.


매표소는 본래 담 바깥에 있었는데, 담 안쪽으로 매표소를 이전한 것 같다. 아마도 형무소 벽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 옮긴 것이 아닐까 싶다. 매표소 오른쪽에는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고, 왼쪽에 관람료와 주의사항을 명시한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맞은 편에 세워진 표지판에 붙어 있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전경. 입구에 들어가서 안내문을 받으면 관람경로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명시되어 있다. 관람경로를 따라 가지 않고 중구난방으로 관람을 하면 과연 관람에 얼마나 걸릴지 장담을 못할듯..


입장권은 두 명분을 한장에 출력하여 준다. 봄 여행주간(황금연휴) 전국 관광지 할인 중이라서 여기도 입장료 할인! 두 사람에 4,800원이다. 지금은 5월이라서 저녁 6시까지 운영하고 있고, 5시 정도에 입장이 마감되는 것 같다.


매표소를 지나 처음 마주하게 되는 서대문형무소역사전시관 정문. 기분이 오묘하다. 이 곳은 독립 전에도 독립 후에도 민족적으로 좋은 기억이라고는 1도 없을 곳이라서 더욱 그렇다.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만나게 되는 을사오적의 면상. 천하제일 매국노 이완용부터 이근택. 권중현. 박제순. 이지용이 한 곳에 있다. 조선말기 일제 침략과정에서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당시에 한국쪽에서 찬성 서명을 한 다섯 놈이다. 조선통감부 설치를 하고 외교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국가의 주권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보호조약 지랄하네.


실물은 일부 유실되고 터만 남은 서대문 형무소의 전경.


벽면에는 지도가, 테이블 위에는 모형이 자리 잡고 있다. 작은 모형이지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의 실제 건물 크기를 보면 정말이지 어마어마하게 크다. 이 넓고 커다란 형무소에 나라의 독립을 바라는 독립운동가들을 꽉꽉 채워넣고 고문했다.


당시 전 지역에 있던 형무소들의 사진을 한 곳에 모아놓은 벽.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는 민주화운동에 대한 기록도 전시되어 있다. 독립 이후 민주화운동을 한 운동가들도 이 곳에 잡혀 들어왔기 때문.


서울 구치소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던 형무소가 경기도 의왕으로 이전하면서, 형무소는 철거되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이 곳을 역사 교훈의 현장이라고 생각한 독립 운동가 후손과 역사학자, 시민운동가들과 서대문구가 보존했다. 그리고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문을 열었다. 이런 곳이 없어질뻔 했다니... 친일청산을 제대로 못해서 그런가.


정말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의병이라함은 국가의 녹을 받는 공무원이 아니라 국민 개인이다.


자신에게 뭔가 이득이 생기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로지 미래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 이득은 커녕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데도 그런데도 앞다투어 독립운동을 했다. 이 나라가 뭐라고. 이 안타까운 목숨들이 희생되어야 했는가 싶으면서도 한없이 감사하고 감사하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내가 지금의 평화로운 오늘을 살고 있으니.


보통 '의사'를 거사에 성공한 사람, '열사'를 거사를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 와서 처음으로 의사와 열사의 차이를, 그 뜻을 제대로 알게 됐다. 의사는 목숨을 바쳐서 무력적인 행동으로 적에 대한 거사를 결행하신 분. 열사는 목숨을 바쳐 맨몸으로 적과 싸워 투쟁하신 분. 지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 적에게 항거하신 분.


매국노 숙청을 위해서 귀국을 하고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순국한 이재명 의사. 1909년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한다. 수차례 칼로 자상을 입혔다고 한다. 범죄심리학에서 볼 때 이 것은 원한살인이다. 나라를 빼앗긴 분노, 나라를 빼앗기게 만든 분노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저 한줄의 기록에서 그 마음이 절절히 느껴진다.


3.1 독립만세 운동을 위해 태극기를 대량으로 만들기 위해서 사용한 태극기 목각판이다. 일일히 그리는 것은 속도가 느리다보니 대량의 태극기를 만들기 위해 목판을 만들어 찍어낸 것 같다. 태극기의 모양은 지금의 태극기와는 모양이 많이 다르다. 목판의 태극기는 1923년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에 걸었던 태극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후로도 많은 변화를 거쳤고 1949년 대한민국 국기제정위원회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결정이 되었다.


역사관 안의 벽. 벽면을 가득하게 채운 독립운동가들의 수감표.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년.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어 명실공히 대한민국 정부가 생겼다. 독립운동의 최고 지휘부였고 현재의 헌법도 현재의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라고 시작되고 있는데 아쉽게도 다리 끊고 달아나신 이승만이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못해서인지, 국민중 일부는 광복절을 건국절이라고 우겨대고 이승만을 건국대통령이라고 우겨대고 있다.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민주화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나라의 보수에는 친일파가 섞여 들게 되었다. 보수라면 독립운동가가 리얼 보수 아닌가. 친일파 후손이 보수 놀이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우습다.


이 부분은 경성트로이카도 경성트로이카지만, 경성트로이카의 이재유의 은신을 도운 일본인 미야케에 대한 이야기 때문에 찍었다.


단파방송 청취사건. 1942년에는 이런 사건도 있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사형장은 현재 복원사업 중이다. 관람동 중 일부에 시신수습실 모형이 만들어져 있었다. 사형장 지하의 시신수습실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고 했는데, 안에 들어갔다가


천장에 걸린 줄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소름이 쫙 끼쳤다. 아무 생각없이 부모님과 함께 들어 온 아이들이 이 것을 보고 놀라 울었고, 어른들도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재현해 둔 곳임에도 그 서늘함이 뼛 속까지 시린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고문실.


마네킹이지만 처참했던 고문장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보는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일제는 한국민의 저항의식을 억누르고 독립운동 세력을 말살하기 위해서 취조하면서 고문과 구타를 일삼았다. 어쩌면 일본인들은 이해하지도 납득하지도 못하겠지만. 역사적으로 일본이 우리나라로부터 문화를 전수받았고 정치 사상적으로 우리보다 우수하지 못하다는 열등의식에서 식민지 한국인들에 대한 폭력과 고문을 일삼았다. 사상 유례가 없는 비인륜적 행위였다.


임시구금실.


취조 과정에서 자행되는 고문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동지들의 비명 소리와 폭언이 들리도록 배치 된 임시구금실에 취조 전 수감자를 임시로 구금했다. 독립운동가들에게 취조전부터 심리적으로 압박을 가했다.


고문기구.
고문실을 돌아다니다 보면 숨을 못쉬게 물에 젖은 종이를 얼굴에 붙인다거나, 손톱 밑에 바늘을 꼽는 것 정도의 고문은 예사였다. 살아남은 독립운동가의 증언 영상을 보면,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남기지 못하도록 씨를 말리려는 일제의 잔인한 고문이 행해졌다. 여자는 막대기를 자궁 속으로 넣어 휘저어 자궁을 완전히 망가뜨리고, 남자는 요도에 쇠꼬챙이를 꼽고 뜨거운 불로 달구었다. 이야기만 전해들었는데도 그 끔찍함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영상에서 이야기를 전해주신 분들은 이제는 고인이 되셨다.)


수갑과 머리에 쓴 바구니.


머리에 쓴 저 바구니(?)는 수감자의 시선을 가리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수감자를 이동시키거나 할 때, 수감자를 보는 국민들이 그 모습에 혐오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씌웠다.


그리고 벽관.


옴짝달싹 할 수도 없는 좁은 공간에 사람을 감금하여 앉을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고통을 준 고문도구다. 벽에 서 있는 관이라해서 벽관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실제로 들어가 서 보니 몸이 아주 꽉 끼는게 답답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다리가 아픈데 이렇게 옴짝달짝 못하는 곳에 끼어서 몇날 며칠이고 고생했을 것을 생각하니 내가 다 고통스럽다.


수감자의 사이즈에 맞추어서 꽉 끼도록 만들기 위함인지 벽관은 다양한 크기가 존재했다.





수감자들에게 매우 열심히 노역을 시킨 양아치 일본놈들


그나마도 틀밥 조차 제대로 배식하지 않아서 항상 배고팠던 수감자들.



편지를 쓸 수 있는 곳 바로 옆에 간수의 감시대가 있다.


편지를 쓸 수 있는 곳이라고 해도 등이 확 트인 서있는 작은 테이블이다. 앉을 수 있는 의자 따위도 없고 간수의 시선을 피할 천막조차 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감옥의 전경.





민주화운동을 하던 운동가들이 수감되었던 곳이기도 하다보니, 5,18 특별전시를 하고 있었다. 이건 또 이거대로 너무 마음이 아팠다. 이러라고, 우리끼리 싸우라고 일제로부터 독립을 위해서 독립운동가들이 고생한 게 아닌데! 친일청산을 제대로 못하니 두고 두고 문제다. 대통령이 바뀌었으니 친일청산을 좀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놈의 북한 빨갱이 아니면 사실상 공공의 적은 '친일파'와 그 후손들이다. 그러니 그렇게 열심히 종북과 빨갱이 노래를 불러대지.


벽면을 가득히 메운 그날의 슬픈 광주의 기록들. 이런 엄청난 학살이 일어났음에도 뉴스는 광주에 불순분자들의 선동으로 쿠데타가 일어난 것으로 보도가 되었다. 문제의 그 방송국은 광주 MBC다. 이 지랄맞은 MBC. 언론통제가 이렇게도 무섭다. 그 날의 이야기를 전국에 제대로 전달했다면, 아직까지 이 사건을 쿠데타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을까.

이 슬픈 사건을 '쿠데타'라는 말로 부를 수 있는 것은 '몰랐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당시의 언론 통제로 광주의 슬픔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도 이제는 모두가 알고 다 알려졌다. 이제 더는 이 일을 '쿠데타'라고 부르면 안되는 것임에도 아직까지도 '쿠데타'라 부르며 남은 유족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있어 마음이 아프다. 타인의 슬픔과 아픔을 '결코 내 일이 되지 않을 것인 양' 조롱거리로 삼는 일은 있으면 안된다. 오늘날 우리를 지금처럼 살게 해준 독립운동가들과 민주화운동가들에게 항상 감사하고 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35년이 지난 지금도 최초의 발포 명령권자는 밝혀지지 않았고 단 한사람도 책임지지 않았다. 그 뿐인가. 임을 위한 행진곡 조차 금지 시켜버렸지!







지금도 5월의 광주는 온 도시가 장례식장 같다. 왜 이 슬픈 사건의 책임자가 아무도 없는 걸까.








감방 문 옆의 패통은 감방 안 위급 상황을 간수에게 알리기 위한 도구였다는데, 과연... 일경과 일본 간수들이 독립운동가가 대부분인 감방 안의 위급 상황에 어떻게 대처를 해줬을지....


서늘한 기운이 가득 도는 형무소에 날씨는 너무나 좋아서 햇빛이 따뜻하다 못해 뜨겁다.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이영희 선생님의 말이다. 오늘날의 기자들이 기레기 소리 듣지 않기 위해서 당연히 지켜야할 기본이 아닐까. 퍼나르기식 기사, 카더라 통신, 가짜 뉴스. 지겹다. 이제 좀 제대로 된 진실을 전해듣고 싶다. 언론 적폐청산이 우선시되어야 할 일이다. 이간질하고 선동하는 게 아니라 진실과 사실을 전달하는 본래의 목적에 충실한 언론이 되었으면 좋겠다.



운동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한 수감자들.



감시대에서 한 눈에 다 보이는 부채꼴 모양의 좁고 불편한 격벽장에서 운동을 해야 했던 수감자들. 사진보다 넓기는 하지만 운동장이라고 하기엔 우습다. 수감자들이 붙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을 금지하고 감시하기 위해서 이따위로 만들었다는데 정말이지 대단한 일본놈들이다.


역사관 벽에 붙은 문구. 당신의 희생이 우리의 현재이자 미래입니다. 이제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고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없다. 무슨 일이 터진다면 국회의원들부터 도망갈거라는 이야기가 평범한 우스갯소리가 되어 돌아다니는 시대다. 당장 나한몸 먹고 살기 힘들어 옆 사람 돌보기 어려워졌음에도 그럼에도 주변을 돌보는건 여전히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희생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한 표를 행사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5월 9일. 한 표를 쓰고, 그 표를 모아서 정권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대한민국이, 그분들이 지키려고 했던 이 나라가 앞으로 더 좋아졌으면 좋겠다. 지킬 가치가 있었다라고, 후손으로써 그분들에게 죄스럽지 않고 부끄럽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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