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갑자기 궁금해져서 시조를 찾아보았다. (밀양박씨 청풍당파)

박씨의 시조는 사실 누가 뭐래도 박혁거세다. 그건 뭐... 반박할 수 없긴 한데.

1세 시조 박혁거세 - 29세 경명왕 - 30세 : 박언침 밀성대군(密城大郡) 밀양박씨(密陽朴氏) 1세 (밀성대군파) - 37세 : 언부(彦孚)공 밀양박씨(密陽朴氏) 8세 (밀성부원군파) - 언부공 8세손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 중미공(中美公) (밀직부원군파) - 중미공의 2남 해공 밀양박씨 대헌공파(大憲公派.청풍당파의 조상) 65대


1세 : 시조(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 
↓ 
2세 : 남해왕(南解王) 
↓ 
3세 : 유리왕(儒理王) 
↓ 
4세 : 일성왕(逸聖王) 
↓ 
5세 : 아달라왕(阿達羅王) 
↓ 
6세 : 벽방(碧芳) 
↓ 
7세 : 무영(武英) 
↓ 
8세 : 판득(判得) 
↓ 
9세 : 광흠(光欽) 
↓ 
10세 : 미일(美一) 
↓ 
11세 : 내물(乃物) 
↓ 
12세 : 상건(相建) 
↓ 
13세 : 인엽(仁燁) 
↓ 
14세 : 계보(啓輔) 
↓ 
15세 : 명신(明信) 
↓ 
16세 : 정환(貞環) 
↓ 
17세 : 로겸(露兼) 
↓ 
18세 : 남선(楠善) 
↓ 
19세 : 금산(金山) 
↓ 
20세 : 응찬(應燦) 
↓ 
21세 : 덕흥(德興) 
↓ 
22세 : 대녕(大寧) 
↓ 
23세 ; 이순(○淳) 
↓ 
24세 : 융겸(隆劒) 
↓ 
25세 : 지곤(之坤) 
↓ 
26세 : 성순(成順) 
↓ 
27세 : 추신(秋信) 
↓ 
28세 : 희복(僖福) 
↓ 
29세 : 경명왕(景明王) 


30세 : 박언침(彦) 밀성대군(密城大郡) 밀양박씨(密陽朴氏) 1세(世) 
31세 : 욱 (郁) 밀양박씨(密陽朴氏) 2세(世)
32세 : 란(瀾) 밀양박씨(密陽朴氏) 3세(世)
33세 : 영정(永禎) 밀양박씨(密陽朴氏) 4세(世)
34세 : 기세(基世) 밀양박씨(密陽朴氏) 5세(世)
35세 : 시주(施做) 밀양박씨(密陽朴氏) 6세(世)
36세 : 찬행(讚行) 밀양박씨(密陽朴氏) 7세(世)
37세 : 언부(彦孚) 밀양박씨(密陽朴氏) 8세(世) 
38세 : 효신(孝臣) 밀양박씨(密陽朴氏) 9세(世)
39세 : 공필(公弼) 충열공(忠烈公) 밀양박씨(密陽朴氏) 10세(世)
40세 : 육경(育慶), 육화(育和) 밀양박씨(密陽朴氏) 11세(世)
41세 : 윤공(允恭) 밀양박씨(密陽朴氏) 12세(世)
42세 : 광례(光禮) 영동정공파(令同正公派) : 원광(元光) 밀양박씨(密陽朴氏) 13세(世)
43세 : 유효(惟孝) 밀양박씨(密陽朴氏) 14세(世)
44세 : 흥 (興) 밀직군파(密直君派) : 중미(中美)정국공파(靖國君派) : 15세손 위 밀양박씨(密陽朴氏) 15세(世)


중시조(中始祖) 박언침(朴彦沈) 할아버님이신 밀성대군(密城大君)께서 본관을 정할 그 당시에 지명이 밀성이었으나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시대(時代)에 밀양으로 변경되었으므로 밀양박씨로 쓰고 있다. 현재 전국적으로 밀성박씨로 쓰는 종파도 있고 밀양박씨로 쓰는 종파도 있으나 똑같은 본관이다. 특히 밀성대군파의 밀양 박씨가 주류를 이루어 박씨 인구의 70∼80%를 차지하고 있는데, 밀양, 반남, 고령, 함양, 죽산, 순천, 무안, 충주박씨를‘8박’이라고 부르며 이들도 모두 중시조 언침의 후손이므로 밀양박씨이다.

신덕왕은 박씨 29세손인 경명왕(신라 54대왕)과 경애왕(신라 55대왕) 그리고 효염(孝廉) 등 3명의 아들을 낳게 된다. 이들 아들들은 각기 분파하여 하나의 집안을 형성하게 된다. 경애왕의 후손들은 계림대군파로 이어져 내려갔다. 경명왕계는 아들대에서 무려 9개 파로 분리된다. 이 박혁거세의 29대 손인 경명왕이 박혁거세 다음으로 우리 가문의 원조가 되는 조상이다. 그러나 경명왕에 이르는 29대 선조들은 밀양박씨던 월성박씨던 모든 박씨의 공통의 조상으로서 밀양박씨 만의 원조라기 보다는 박씨 모두의 선조라고 할 수 있다.밀양박씨의 실질적인 조상은 경명왕의 장자인 밀성대군이라 할 수 있다. 즉, 경명왕의 자식 중 한분인 밀성대군이 우리의 중시조가 된다. 경명왕은 아들 9형제를 두었고, 이들 아들들이 각각 하나의 파를 형성하면서 현재의 박씨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첫째 아들 언침公은 밀성대군(密城大君)으로서 밀양박씨, 반남박씨, 진원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둘째 언성公은 고양대군(高陽大君)으로서 고령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셋째 언신公은 속함대군(速咸大君)으로서 함양박씨, 삼척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넷째 언립公은 죽성대군(竹城大君)으로서 죽산박씨, 음성박씨, 고성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다섯째 언창公은 사벌대군(沙伐大君)으로서 상주박씨, 충주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여섯째 언화公은 완산대군(完山大君)으로서 전주박씨, 무안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일곱째 언지公은 강남대군(江南大君)으로서 순천박씨, 춘천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여덟째 언의公은 월성대군(月城大君)으로서 경주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아홉째 교순公은 국상공(國尙公)으로서 울산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결국 우리 밀양박씨는 경명왕의 자식들 중에서 밀성대군(密城大君)의 후손(後孫)으로서 밀성대군(密城大君)이 밀양박씨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밀양박씨가 본관(本貫)을 밀양(密陽)으로 하게 된 것은 경명왕(景明王)의 첫째 왕자(王子) 언침(彦 )公이 밀성대군(密城大君)에 봉(封)해진데서 연유된다.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公은 밀양박씨의 중시조로서 혁거세(赫居世) 성조의 30세손이며,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8왕자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나말여초(羅末麗初)의 혼란기에 밀성군에 봉해졌고, 1천여년 동안 찬란한 문화를 이룩한 신라의 왕족으로서 활동하면서 우리 민족의 역사 발전에 크게 기여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불행히도 매몰찬 세월의 풍진(風塵) 속에 묘소마저 깎이어, 단소(壇所)를 세워 모시고 있다. '밀성(密城)'이란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密陽)의 옛 지명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곳에는 신라의 이궁대(離宮臺)와 세루정(洗陋亭)과 같은 여러 정자가 있어 역대 왕들이 자주 들러 백성을 위무하고 정사를 보았다고 하며, 경명왕의 맏왕자가 밀성군으로 봉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밀성대군 언침의 단소(壇所)와 서원 및 재실을 보면, 율산서원은 경북 경산시에 있으며, 밀성대군 언침이 배향된 재실 명일재는 경남 밀양시 내일동에 소재해 있다.
밀성대군 언침公의 후손으로는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한 욱(郁, 31세)公, 독포사(督捕使)를 역임한 난( , 32세),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한 영정(永禎, 33세)公, 합문지후(閤門祗候)에 봉임된 기세(基世, 34세)公,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한 시주(施做, 35세)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한 찬행(讚行, 36세)公 등으로 이어진다.



중시조 밀성부원군 언부공(彦孚公)  - 밀성부원군파

밀성대군 8세손 언부공(彦孚公)은 고려 문종조(文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권신權臣) 최충(崔沖)과 함께 태사(太師)를 지내고 문하시중과 도평의사(都評議事)를 거쳐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에 봉해졌다.이로 인해 언부공(彦孚公)에 이르러 밀양박씨에서는 다시 분파가 있었다.
 
언부공 파조(派祖)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를 비롯하여 도평의사공파(都評議事公派: 언상公)·좌복야공파(左僕射公派: 언인公)·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양언公)·판도공파(版圖公派: 천익公)·좌윤공파(左尹公派: 을재公)으로 분파되었다. 또한 이들의 후손에서도 진사공파(進士公派: 10세손 원)·밀성군파(密城郡派: 13세손 척)·동정공파(同正公派 : 13세손 원광)·밀직부원군파(密直府院君派: 15세손 중미)·정국공파(靖國公派: 15세손 위)·규정공파(糾正公派: 16세손 현) 등으로 분파(分派)가 되어 크게 밀양박씨의 12파로 나누어져 아랫대로 내려온다.
그리고 10세손 환(桓)이 영암 박씨(靈岩朴氏)로 분적(分籍)하는 등 10여 개 본관으로 갈라지기도 한다.

밀성부원군 언부공(彦孚公)은 두 아들을 두었다. 첫째 아들은 효신(孝臣)公이며 둘째 아들은 의신(義臣)公이다. 이중 효신公은 문익공으로서 밀양박씨 충렬공파를 형성하게 된다. 우리의 직계 조상은 둘째 아들인 의신公이 된다. 의신公은 고려 인종 때 공부상서를 역임하였으며 우리의 중시조가 된다.
 
밀성부원군 언부公의 차남 의신公의 후손에서는 사문진사(四門進士) 원(元: 의신의 맏아들)公의 계통과 의흥위(義興衛)로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던 척(陟: 의신의 현손)公의 인맥이 두드러진다. 원(元)의 8세손 의중(宜中)公은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문과에 장원하고 우왕(禑王)때 대사성(大司成)과 밀직제학(密直提學)을 거쳐 뒤에 공신(功臣)에 올랐으며, 조선이 개국(開國)하자 조준(照準)·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고려사(高麗史)를 수찬(修撰)했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인(門人)으로 성리학(性理學)에 밝았으며 우아한 문장(文章)으로 문치(文治)에 고명(高名)하였다.  문종(文宗)때 경흥부사(慶興府使)로 재직중 야인(野人) 토벌에 전공을 세웠던 거겸(居兼)公은 의중의 손자이며 증판서(贈判書)인 경빈(景斌)公의 아들로 성종(成宗)때 좌리사등공신(佐理四等功臣)으로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졌다. 또한 우리의 직계 선조인 의신公의 아들 윤(允)公의 계통에서는 중미公이라는 걸출한 분이 나타난다.

중시조(中始祖)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 중미공(中美公)
그리고 또하나의 중시조(中始祖)로는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인 중미공(中美公)를 들 수 있다.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 중미공(中美公)은 호(號)가 죽은(죽은)으로서 밀성부원군(密城府院君) 언부공(彦孚公)의 8세손이다.
 
고려(高麗) 충목왕(忠穆王)때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중서령(中書令)에 오르고, 고려말(高麗末)인 1361년(고려 공민왕(恭愍王) 10년에 홍건적(紅巾賊)이 쳐들어와 괴수(魁首)인 모거경(毛居敬)이 서경을 침범(侵犯)하였을 때 공민왕(恭愍王)을 호위(護衛)하며 안유(安裕), 이방실(李着實), 홍언박(紅彦博) 등(等)과 함께 홍건적(紅巾賊)을 격퇴(擊退)하고 난(亂)을 평정하였다. 이 공(公)으로 인해 보리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補理功臣,大匡 輔國, 崇錄大夫)에 가자되고 밀직부원군(密直府院君)에 봉(封)해졌다.
 
밀직부원군 중미公은 슬하에 아들 둘을 두었는데 첫째가 희公이고 둘째가 해公이다. 이 희公은 화령군 소윤이라는 직책에 올랐고, 해公은 대사헌이라는 직책에 올랐다.

따라서 이 분들의 직책을 인용하여 각기 하나의 파로 분파되었는데, 희公의 후손들은 밀양박씨 소윤공파(小尹公派)라 하게 되고, 다른 한 분 해公의 후손은 밀양박씨 대헌공파(大憲公派.청풍당파의 조상)라 하게 되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샷시문, 유리문, 현관문 방화문으로 교체비용, 방화문으로 바꾸는 가격

샷시문 방화문으로 교체. 유리문 방화문으로 교체. 현관문 철문 교체. 현관문 철문 가격. 내가 왜 이런것을 알아보았느냐면, 우리집에는 현관문이 2개가 있다. 1층 현관문과 2층 현관문. 2층 현관문은 보시다시피 알루미늄 샷시에 유리가 끼워져있는 매우 부실한 현관문이다. 물론 1층에도 현관문이 하나 더 있기 때문에 크게 신경쓸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여기는 지금 안락동집처럼 외부 창고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택배를 받기가 애매해서, 부피가 큰 택배를 받을때 1층 현관문을 열어두기 위해 2층 현관문을 보강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집 문의 크기는 아래와 같다. (cm) 문틀포함 문높이 171 / 문틀포함 문폭 76 문틀비포함 문높이 172 / 문틀비포함 문폭 69 문틀면 폭 5~6 문윗 스틸 폭 10 / 문옆 스틸폭 7 / 문가운데 스틸폭 10 / 문아래 스틸폭 50 문윗유리 가로 54 / 문윗유리 세로 69 문아랫유리 가로 54 / 문아랫유리 세로 30 안락동집 근처 문마트라는 곳에 가서 사이즈와 사진을 보여주고 견적을 받았다. 지식인은 물론 카페와 블로그, 각종 사이트 등에서 나와 같은 경우를 찾아 보고 엄청나게 알아보았으나, 다들 교체비용이 40~50만원이 든다고 하더라. 집근처에 문마트가 있다는 걸 떠올리고 직접 견적을 내러 가보니 문틀 포함해서 시공비까지 27만원이라고 했다. 샷시문 철문으로 교체, 현관문 철문으로 교체하는게 27만원이면 충분하다. 주문하고 맞춤 제작이 들어가기 때문에 시공 완료까지 일주일정도 소요가 된다고 한다. 나 말고도 막막하게 인터넷으로 알아보는 사람들을 위해서 정보 공유차 글을 올려본다. 불안에 떨지말고, 문을 철문, 방화문 교체하는거 크게 비싸지 않다. 한달 월세만큼이면 충분하니 집주인하고 상의해보거나 해서 부산분이라면 교체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철문이라고 해도 문에 틈이 있으면 장도리로 뚫리고, 홀커터로 털릴 수도 있는거라 완전한 안전지대는 없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안하지 않은가. 더

천주교 성경책 구입

수요일 교리를 마치고도 봉사자님께 질문을 드렸었지만, 천주교는 개신교와는 성경이 다르다. 사실 나는 9월 말에 프리마켓에서 중고로 구입한 '개신교 성경책'이 있다. 그때만해도 내가 몇주 뒤에 성당에 다니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교양서 읽듯이 읽어보려고 샀었다. 하지만 '우리말 성경'이라고 해놓고서 번역이 엉망진창이라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포기했다. 제대로 보지 못하고 구석에 처박힌 개신교 성경은 뒤로하고, 천주교 성경이 필요했다.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니 신자의 가정에 비치해야할 물건에는, 성경책, 가톨릭기도서, 성가집, 십자고상, 성모상, 묵주 가 있다고 했다. 사실 교재 공부를 할 때도 성경이 필요해서 성경책을 하나 구입하려고는 했는데,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달랑 대,중,소에 1단, 2단 이렇게 쓰여져 있는데 무슨 소린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지퍼가 있고 없고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곁에 두고 자주 읽을 책이니 직접 보고 결정하기로 마음 먹었다. 천주교 수영성당으로 향했다. 2단으로 된 성경책을 사가지고 왔다. 재미있게도 이 성경책은 모든 곳에서 판매가가 29,000원이다.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신기한 일이다. 세로 22cm, 가로는 15.5cm 정도 된다. 2단이지만 폰트가 깔끔하고 읽기 편하게 되어 있다. 굵기도 적당해서 수시로 펴고 읽기에 좋았다. 개신교 성경처럼 화려하지도 장식이 있지도 않지만, 표지는 감촉이 좋고 책장 넘김도 좋고 책갈피 줄도 두 줄이나 있다. 크기도 딱 적당하다. 매우 마음에 든다. 이렇게 나의 첫 신앙물품은 당연하게도 성경책이 됐다. 교회 공용으로 사용하는 성경이 있다니. 이것도 천주교라서 가능한 걸까. 내가 구입한 책은 2017년 5월 1일에 재판된 책이다. 이제 공부 준비는 충분한 것 같다. 책상 위 나와 가장 가까운 위치의 책꽂이에 성경책과 교재를 꼽아 두었다. 언제라도 꺼내서 볼 수 있도록. 사실 성경책은 그날의 독서에

화장실 문이 잠겼을 때 여는 방법

10일. 손님이 왔다가 갔다. 손님이 화장실을 사용했는데, 나중에 손님이 집에 간 뒤 들어가려고 보니까 화장실 문이 안에서 잠겼다. 이런 망할. 일단 급한대로 가까운 지하철역 화장실에 다녀왔다. 현관문에 붙어 있는 열쇠상에 다 전화를 돌렸지만, 새벽 한 시에 와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슈퍼가서 손톱가는 것을 사와서 집에 있는 클립과 함께 진지하게 화장실 문따기를 시작했다. 우리집 화장실은 안쪽으로 열리는 타입이라 턱이 있어서 난이도가 좀 있었다. 손톱 가는 것과 클립 펼친 것과 제본 표지였던 플라스틱 접은 것으로 사투 끝에 문을 여는데에 성공했다. 문을 열고 원인을 확인해보니, 보통은 화장실 문은 잠그고서 안에서 문고리를 돌리면 같이 열리는데, 이 문은 안에서 문고리를 돌리면 열리기는 하는데 잠금은 안 풀리는 것이다. 그래서 닫힌 뒤에 밖에서는 열리지 않는 문제가 발생한다. 앞으로 손님이 올 때는 이점을 꼭 당부를 드려야겠다. 진짜 식겁했다. 아무튼 문을 따고 나서 이쪽으로 전직을 해야하는 걸까나 라는 그런 생각을 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