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행선지. 월남 이상재 선생 생가지에 방문했다. 이때 느지막이 일어나서 점심 먹고 돌아다니다 보니 이상재 선생 생가에 방문한 것은 오후 다섯시가 다 되어서였다. 이날 하루에 총 네 곳에 방문을 했는데, 내가 운전을 하지는 않았지만 좀 빡세기는 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오니 이상재 선생 생가지의 안내 사무실이 바로 보인다. 그 앞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천군 관광 안내도'가 있다.
엄마는 입장료를 걱정했지만 입장료는 무료다. 이상재 선생 생가는 생가만 덜렁 있지 않고 너른 땅 위에 정자나 비석이나 전시관이 함께 있었다. 정원이 잘 꾸며져 있었고 맘먹고 넘으면 넘어질 낮고 예쁜 담벼락이 둘러져 있었다.
문화 관광해설사가 근무를 하고 있지만, 5시까지만 근무하시는 관계로 우리는 우리끼리 알아서 관람을 해야만 했다. 운영시간은 오후 6시까지. 11월부터는 오후 5시까지 인 듯 하다. 다행히 방문했을 때가 10월이어서 5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관람을 할 수 있었다.
월남 이상재 선생 생가지의 안내판 - 어디서 많이 본 디자인인데 문헌서원에서 본 그거 맞다 - 에는 근처의 '천년 솔바람길'의 지도도 같이 그려져 있다. 입구에서부터 가운데 길을 따라 쭉 들어가면 이상재 선생 전시관이 나온다.
평일 오후이고 찾는 이가 적다 보니 관리자분이 문을 닫아 두셨었는데, 우리 일행이 오니까 같이 가셔서 전시관 문을 열어주셨다. 외관과 어울리는 나무 문 안쪽에 유리문이 하나 더 있는 묘한 구조다.
입구로 들어서면 정면에 보이는 이상재 선생 동상. 그 뒤에 이상재 선생이 조선 청년에게 전하는 글귀가 적혀 있다. 유리 벽 너머로 파란색 바탕에 쓰여 있는데, 이게 묘하게 디자인이 예쁘다.
전시관 내부는 월남 선생의 업적과 함께 그가 쓴 글씨들이 전시되어 있다. 벽을 가득히 메운 액자 속의 월남 선생의 글이 필체가 매우 멋져서 아빠와 엄마는 한동안 그것을 보고 계셨다. 한자를 못 읽으므로 보아도 잘 모르기 때문에 나는 이상재 선생의 업적을 적어둔 것들 위주로 관람을 했다.
이것을 보고 좀 빵 터졌다. 나라 망하게 하는 천재들이니 일본으로 이사하면 일본도 망할 게 아닌가!라는 말. 센스가 죽여준다.
재미있게도 월남 이상재 선생은 앞서 포스팅한 문헌서원의 목은 이색 선생의 후손이기도 하다. 목은 이색 선생이 한산 이 씨 7세, 월남 상재 선생이 23세손이다.
전시관을 한 바퀴 돌아 관람을 마치고 나오면 오른쪽으로 큰 길 끝에 월남 이상재 선생의 생가가 있다.
초가지붕이 덮인 소박한 이 집이 월남 이상재 선생의 생가다.
가운데 집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큰 문, 왼쪽으로는 작은 문이 나 있다.
왼쪽 출입문 옆에는 비석과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비석은 세월의 흔적으로 보아 오래된 것 같고, 표지판은 오래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충청남도의 기념물 제84호로 지정되어 있다.
집은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초가집으로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다. 솟을 대문이 있다. 안채는 1800년 경에, 사랑채는 1826년에 지었으나 훼손, 유실되어 1955년에 없어졌었다. 1972년과 1980년에 두 차례에 걸쳐 복원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게 안채이고,
,이게 사랑채가 아닐까!
따끈따끈했을 것 같은 부뚜막. 벽을 타고 오른 그을음이 실제로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는 느낌을 준다. 한쪽에는 장작도 쌓여 있다. 실제로 누군가 살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 문화재니까.
따끈따끈해 보이는 예쁜 굴뚝. 이 굴뚝을 통해서 아궁이 연기가 피어오르나 보다. 굴뚝 디테일 보소.
초가집 지붕 아래로 빗물이 흘러내린 자국이 그대로 보인다. 집 안에 들어가 볼 수는 없지만, 소박하게 살았을 이상재 선생의 삶이 비쳐 보이는 곳이다.
서천에 있던 것은 오래되었음에도 나는 물론이고 아빠, 엄마도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아무래도 차가 없으면 방문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고, 대부분의 서천군의 관광지는 대중교통 접근성이 낮아서 그것이 참 아쉽다. 서천 스탬프 여행 도장은 입구의 안내소에서 찍어 준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오니 이상재 선생 생가지의 안내 사무실이 바로 보인다. 그 앞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천군 관광 안내도'가 있다.
엄마는 입장료를 걱정했지만 입장료는 무료다. 이상재 선생 생가는 생가만 덜렁 있지 않고 너른 땅 위에 정자나 비석이나 전시관이 함께 있었다. 정원이 잘 꾸며져 있었고 맘먹고 넘으면 넘어질 낮고 예쁜 담벼락이 둘러져 있었다.
문화 관광해설사가 근무를 하고 있지만, 5시까지만 근무하시는 관계로 우리는 우리끼리 알아서 관람을 해야만 했다. 운영시간은 오후 6시까지. 11월부터는 오후 5시까지 인 듯 하다. 다행히 방문했을 때가 10월이어서 5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관람을 할 수 있었다.
월남 이상재 선생 생가지의 안내판 - 어디서 많이 본 디자인인데 문헌서원에서 본 그거 맞다 - 에는 근처의 '천년 솔바람길'의 지도도 같이 그려져 있다. 입구에서부터 가운데 길을 따라 쭉 들어가면 이상재 선생 전시관이 나온다.
평일 오후이고 찾는 이가 적다 보니 관리자분이 문을 닫아 두셨었는데, 우리 일행이 오니까 같이 가셔서 전시관 문을 열어주셨다. 외관과 어울리는 나무 문 안쪽에 유리문이 하나 더 있는 묘한 구조다.
입구로 들어서면 정면에 보이는 이상재 선생 동상. 그 뒤에 이상재 선생이 조선 청년에게 전하는 글귀가 적혀 있다. 유리 벽 너머로 파란색 바탕에 쓰여 있는데, 이게 묘하게 디자인이 예쁘다.
전시관 내부는 월남 선생의 업적과 함께 그가 쓴 글씨들이 전시되어 있다. 벽을 가득히 메운 액자 속의 월남 선생의 글이 필체가 매우 멋져서 아빠와 엄마는 한동안 그것을 보고 계셨다. 한자를 못 읽으므로 보아도 잘 모르기 때문에 나는 이상재 선생의 업적을 적어둔 것들 위주로 관람을 했다.
이것을 보고 좀 빵 터졌다. 나라 망하게 하는 천재들이니 일본으로 이사하면 일본도 망할 게 아닌가!라는 말. 센스가 죽여준다.
재미있게도 월남 이상재 선생은 앞서 포스팅한 문헌서원의 목은 이색 선생의 후손이기도 하다. 목은 이색 선생이 한산 이 씨 7세, 월남 상재 선생이 23세손이다.
전시관을 한 바퀴 돌아 관람을 마치고 나오면 오른쪽으로 큰 길 끝에 월남 이상재 선생의 생가가 있다.
초가지붕이 덮인 소박한 이 집이 월남 이상재 선생의 생가다.
가운데 집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큰 문, 왼쪽으로는 작은 문이 나 있다.
왼쪽 출입문 옆에는 비석과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비석은 세월의 흔적으로 보아 오래된 것 같고, 표지판은 오래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충청남도의 기념물 제84호로 지정되어 있다.
집은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초가집으로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다. 솟을 대문이 있다. 안채는 1800년 경에, 사랑채는 1826년에 지었으나 훼손, 유실되어 1955년에 없어졌었다. 1972년과 1980년에 두 차례에 걸쳐 복원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게 안채이고,
,이게 사랑채가 아닐까!
따끈따끈했을 것 같은 부뚜막. 벽을 타고 오른 그을음이 실제로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는 느낌을 준다. 한쪽에는 장작도 쌓여 있다. 실제로 누군가 살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 문화재니까.
따끈따끈해 보이는 예쁜 굴뚝. 이 굴뚝을 통해서 아궁이 연기가 피어오르나 보다. 굴뚝 디테일 보소.
초가집 지붕 아래로 빗물이 흘러내린 자국이 그대로 보인다. 집 안에 들어가 볼 수는 없지만, 소박하게 살았을 이상재 선생의 삶이 비쳐 보이는 곳이다.
서천에 있던 것은 오래되었음에도 나는 물론이고 아빠, 엄마도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아무래도 차가 없으면 방문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고, 대부분의 서천군의 관광지는 대중교통 접근성이 낮아서 그것이 참 아쉽다. 서천 스탬프 여행 도장은 입구의 안내소에서 찍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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