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을 보았다. 고향에 올라갔을 때, 관람했다.
사실 그렇다. 이 영화는 매우 담담한 역사 교과서 같다. 이 사건에 대해서 그저 역사 책의 한 줄로만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교육용으로 써도 좋을 만큼 당시의 상황을 잘 담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같은 치욕스러운 역사이지만, 그보다 더한 인재다.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진 재해란 것이다.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 청의 대군이 공격해오자 임금과 조정은 적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숨어든다. 나아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그곳에 갇힌 나라의 운명. 그리고 역사책 속에 결국 인조는 청에 항복한다. 말이 좋아서 화친이고 신하의 나라가 된 것이지 그것은 노예나 다름없었다. 역사 속에서 인조는 삼배구고두례를 하며 이마가 피범벅이 되는데 영화에서의 인조, 박해일은 침통한 표정으로 절을 하지만 머리를 내리찧지는 않는다. 이미 아는 이야기.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
"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산 것인가,나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 영화는 눈으로 읽는 소설처럼 아주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각 장을 나누어 영화를 보면서도 소설을 읽는듯한 느낌이다. 불필요한 액션을 넣어서 과하지 않다. 영화는 '전쟁'보다는 '인물'에 초점을 둔다.
기개를 지키는 것이 산 것인가.
무엇으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과 청의 치욕스러운 공격에 끝까지 맞서 싸워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의 의견은 첨예하게 대립한다.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 광해를 몰아내고 인조반정을 일으켜 인조를 왕으로 세운 조정이야 두말할 것도 없이 명의 신하로써 청을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힘없는 왕이지만 자존심은 있는 왕인 인조는 스스로는 결정하지 않고 신하들의 결정에만 따른다. 세자를 내어줄 수는 없고 자신이 신하가 될 수도 없다. 자존심은 있으나 힘은 없다. 그리고 힘없는 왕은 백성들을 괴롭게 만든다.
이 영화는 조정 대신들이 입으로만 방정을 떠는 것을 비춰주는 한편, 엄동설한을 온몸으로 맞는 백성들을 비춰준다. 조정 대신의 세 치 혀에 하루아침에 볏짚 지붕을 잃고, 전장에서 추위를 덜어줄 가마니조차 잃고 동상에 걸려 쓰러져가는 백성들 말이다.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이 책임을 지지 않고 애먼 백성들이 그 책임을 대신 진다. 무책임한 장수이자 간신인 영상이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와 책임을 다른 이에게 미루고 그 책임이 미뤄진 이는 참수를 당하는 장면에서 어이 광탈하는 감정을 느꼈다. 모두가 그의 간신짓에 어이없어 했고, 오죽하면 인조의
" 영상의 목을 베자는 상소도 있소. "라는 말에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을까.
인조반정. 1623년 서인 세력이 정권을 잡기 위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이종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 이종이 바로 인조다. 광해군은 명청 교체기에서 중립 외교를 하여 조선의 안보를 유지하려고 했었다. 실제로도 명은 지는 해, 청은 떠오르는 해였다. 명의 신하로써 권세를 누려온 이들은 청과 화친하여 자신들이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했고 뻔히 아는 미래임에도 자신들의 이해득실에 따라 광해군을 내치고 권력을 잡는데 성공한다. 정치적 야욕으로 반정을 일으켜 왕을 갈아치운 이들이 과연 충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반정에 의해 왕이 된 인조 자신도 시종일관 신하들의 말에 휘둘리며 그 무엇 하나 스스로 결정하려 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무책임하고 힘없는 왕과 직접 움직일 용기는 없고 피해 보고 싶지도 않으면서 세치 혀 놀리는 것만은 세계 제일인 종신들. 죽어나가는 것은 백성뿐이다. 극중 날쇠의 말처럼 백성은 나라가 명과 붙어먹든, 청과 붙어먹든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끝내 자존심을 지키고 책임을 미루던 왕에게 신하들은 '네가 왕이니 네가 결정하면 따르겠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살고자 한다.
영화는 딱 그가 청의 황제 앞에서 절을 하는 모습에서 마무리가 되지만, 진짜 비극은 그 뒤부터 시작된다. 답이 없고 고독하고 춥고 씁쓸하다. 힘없는 왕이 군신들의 세 치 혀에 놀아나 국정이 위태로워졌다고 하더라도 책임은 결국 왕이 져야 할 것이다. 딱 지금 503호에 앉아 있는 사람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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